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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란 - 오정희 짧은 소설집
저자 : 오정희 ㅣ 출판사 : 시공사

2022.08.31 ㅣ 344p ㅣ ISBN-13 : 97911692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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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문학 > 국내소설 > 한국소설
40대 전후 여성의 삶을 그린 오정희의 공감 소설

지금 이 삶 말고 다른 삶, 누구라도 꿈꿔보지 않겠는가

‘활란, 그녀에게 미래란
끝없이 뻗어 있는 길이 아니었다.’


해외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한국 작가,
한국 여성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가 오정희의 삶과 사유가 투영된 소설

한국 문학에서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드물던 시절부터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독자와 평단 양쪽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아온 작가 오정희의 『활란』은 다양한 매체에 발표해온 짧은소설 42편의 모음집이다. 일찍이 이상문학상(1979), 동인문학상(1982) 등을 수상했고 2003년엔 장편소설 『새』로 독일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하여 최초로 해외 문학상을 받은 한국 작가로 기록된 오정희는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준 대명사가 되었다. 『활란』에 실린, 오정희 작품 세계의 이야기 씨앗이자 이야기 편린이라 할 짧은소설들은, 이 책의 작품 해설을 쓴 소설가 장정일의 말대로, “오정희의 비밀스러운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작가의 이름난 단편소설이 쌓아올린 세계관의 조각을 간직하고 있다.” 잘 알려진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장은 이 안에서 특별히 더 재미있고 경쾌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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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작가의 말 짧은 것의 의미

1 나는 누구일까
부부
아내의 가을
아들이 좋은 것은
나는 누구일까
간접화법의 사랑
복사꽃 그늘 아래서
비 오는 날의 펜팔
상봉기
요즘 아이들
해산
방생
고장 난 브레이크

2 건망증
506호 여자
건망증
세월은 가도
어떤 자원봉사
그 가을의 사랑
아내의 외출
병아리
한낮의 산책
꽃핀 날
소음공해

3 떠 있는 방
사십 세
은점이
꽃다발로 온 손님
아내의 삼십 대
떠 있는 방
맞불 지르기
결혼반지
금연선언
낭패

4 서정시대
돼지꿈
치통
독립선언
자라
서정시대
휴가
골동품
보약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한밤의 불청객
긴 오후

작품해설(장정일) 개척자였던 오정희


[본 문]

“궁상떨지 말고 사람을 사서 해. 고기 두 근 값이면 하루 품을 살 수 있어. 그게 경제적이야. 우리 손으로 사흘 할 거 반나절이면 끝난다니까. 너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미장이가 밥 먹겠니? 나도 이제껏 알뜰히 살겠다고 내 손으로 다 했다만 일손 안 맞아서 남편과 싸우는 일이 지겨워 삯일을 줄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내가 고기 두 근 값을 아낄 만큼 알뜰한 주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 담 안에서의 모든 일에 남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는 수칙을 고수하는 것은 그것이 밥을 짓는 일, 빨래를 하는 일처럼 무언가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정직성과 관계있는 듯이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부부」에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알아. 난 상상력이 풍부해서 네 언행 하나하나에서도 네가 앞으로 살아갈 길이 훤히 보인다. 장차 어떤 인간이 되려고 사사건건 부모 말을 어기느냐.”
“소설 읽으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니 염려 마세요.”
아들이 픽 웃었다. 아내가 아무리 처녀 시절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고 지금도 소설 읽기가 유일한 취미라곤 하지만 상상이나 비약은 지나친 바 있다.
“알긴 뭘 알아. 아무리 큰 척해도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야. 아직은 내가 너보다 정신 맑고 판단력이 있으니 내 말을 들어야 해. 훗날 내가 노망들어 분별력이 없어지면 그땐 네가 나를 가르치렴.” (「아내의 가을」에서)

아들 낳는 것이 큰 벼슬하는 것도 아닐진대 4대 독자 내세우는 집안에 들어가 지레 주눅이 들었던 탓인가. 첫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삼칠일이 지나 찾아간 정임의 눈에 경옥의 모습은 처참해 보였다. […]
“아들이었으면 좀 좋아?”
태기가 있자 그날부터 시어머니가 정한수 떠놓고 열 달 내내 아들이기를 축수했었다는 말에 정임은 기가 막혔다. 두 번째 임신을 하자 경옥은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듯했다. (「아들이 좋은 것은」에서)

“참 영이 혼사는 어떻게 됐지?”
한가하고 무료한 늙은 부부들처럼 대화는 종작없고 두서없었다. 영이란 큰댁 조카였다.
“궁합이 안 맞아서 형님이 꺼리세요. 하긴 궁합을 보나 안 보나 어차피 결혼은 도박이지 뭐.”
“그런가? 당신은 도박을 해서 딴 셈인가, 잃은 셈인가?”
“글쎄, 본전치기나 될라는가 모르겠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나고 싶어?”
슬며시 장난기가 동한 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남편에게 ‘아니’라고 강하게 도리질까지 해댄 것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나는 누구일까」에서)

“반찬 투정은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이니? 그리고 낟알 귀한 줄 알아야지. 옛날 나라님도 하늘이 무서워 음식 타박은 못 했단다.”
졸지에 얻어맞은 아이들은 울음보를 터뜨리고 저녁 식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어미가 미우면 제 자식 팬다더라.”
부엌과 터진 거실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던 시어머니가 아이고 내 새끼들, 애먼 화풀이를 당하는구나 어쩌구 너스레를 떨며 아이들을 불러 품에 안았다. […] 시종 못 본 척 묵묵히 밥을 먹고 난 민수는 역시 쓰다 달다 한마디 없이 석간신문을 주워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해산」에서)

“내가 기억해야 할 게 당신 양복뿐이냐. 당신은 내 건망증이 마치 타고난 장애인 것처럼 타매하지만 선천성 건망증 환자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 분별 없이 들뛰는 세 아이 기르느라, 구차한 살림 꾸려가느라, 또 성미 급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편 비위 맞추느라 전전긍긍, 갈가리 흩어진 신경으로 살아오면서 맑은 정신도 기력도 다 도둑맞은 게 아닌가. 신문에서 보니 주부가 기억해야 할 것이 이천 가지도 넘는다더라. 당신은 컴퓨터하고나 살아야 할 사람이다. 나도 지쳤다. 당신 눈엔 내가 잊어버리기 대장, 무용지물로 보일 테지만 만약 하루라도 내가 없어봐라. […]” (「건망증」에서)

“집에 가봤니? 엄마가 또 안 계셔?”
물으나마나 뻔히 알면서도 한마디 하는 것은 문은 열어주었으되 모처럼의 호젓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승한 탓이고 그 애 엄마에 대한, 달리 표현할 수 없는 힐난이었다.
“봉사 나가셨어요. 저녁에 오신대요.”
곧 명우가 돌아오고 잇따라 욱현이가 올 테고, 그 애 엄마가 돌아오는 저녁때까지는 집 안이 도리 없이 난장판이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어이구 내 팔자야,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자기 친정 언니쯤 되는 줄 아나, 만만한 싹을 보았나, 아니면 먹다 버린 쉰 떡인 줄 아나, 허구한 날 애들을 떠맡기고 어디로 돌아다니는 거야. 제집, 제 아이 단속도 못 하면서 자원봉사라니. 구실이 좋고 이름이 좋아 사회활동이지. 결국 살림하기, 아이들 치다꺼리가 싫어서 차려입고 나돌아다니자는 거지 뭐야. 자기 성장이라구? 남에게 봉사라구?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성인 말씀에 그른 게 없어. (「어떤 자원봉사」에서)

거실 탁자의 갓등을 켜고 커피를 진하게 끓여 마시며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었다. 첼로의 감미로운 선율이 흐르고 나는 어슴푸레하고 아득한 공간, 먼 옛날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에 잠겨들었다. 몽상과 시와 꿈과 불투명한 미래가 약간은 불안하게, 그러나 기대와 신비한 예감으로 존재하던 시절, 내가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절로. 사람이 단돈 몇 푼 잃는 것은 금세 알아도 본질적인 것을 잃어가는 것에는 무감각하다던가? 눈을 감고 하염없이 소나타의 음률에 따라 흐르던 나는 그 감미롭고 슬픔에 찬 흐름을 압도하며 끼어든 불청객에 사납게 눈을 치떴다. 드륵드륵드르륵, 무거운 수레를 끄는 듯 둔탁한 그 소리는 중년 여자의 부질없는 회한과 감상을 비웃듯 천장 위에서 쉼 없이 들려왔다. 십 분, 이십 분. 초침까지 헤아리며 천장을 노려보다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전축을 껐다. (「소음공해」에서)

오천만 원. 큰돈 관리는 남편이 하는 터라 활란으로서는 만져보기 어려운 거금이었다. 봉투를 열어 확인하고 핸드백에 넣다가 꺼내 내일 입을 옷 속주머니 깊이 넣었다. 자신의 건망증이 두려워 다시 꺼냈다. 천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라 후루룩 가슴이 떨렸다. 이 돈을 가지고 뒤돌아보지 않고 이 자리에서 그대로 걸어 나간다면? 통속적인 비유로 아마 운명이 바뀌는 게 될 테지. 흐르는 물살처럼 떠밀려온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새로운 생을 살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통쾌한 일일까. 물론 그 돈을 가지고 집을 뛰쳐나가는 일이야 천만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활란은 단지 그 돈을 둘 곳이 마땅찮아 망설이는 양 찬장 서랍에 넣었다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떨리는 손으로 세어보곤 했다. (「사십 세」에서)

“아니 왜 그래? 어디 아파?”
“당신은 내가 몸이나 아파야만 울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요?”
이유야 어떻든 상서롭지 못한 새벽의 곡성을 우선 멈춰놓고 보자는 생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 말뿐이었다.
하도 오랜만에 대하는 아내의 울음인지라 그는 달랠 방법을 몰라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
막내가 감기라더니 병원에 가서 무슨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건가. 혹은 친정 쪽에 말 못 할 사정이 생긴 걸까. 아니면 어젯밤 술김에 내가 험한 말을 했었나. 그는 곰곰 생각해보았으나 도무지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몰라요, 내가 왜 그러는지.” (「아내의 삼십 대」에서)

며칠 전 밤에 이 길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밤바람을 쐬러 길가에 나앉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어린아이가 휘황히 불 밝힌 우리 아파트의 창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꼭 별빛 같다, 그치?”
“아냐, 떠 있는 방들이야.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무서울 거야.”
떠 있는 방. 지상으로부터 13층 높이에 떠 있는 우리의 삶. 생활. […] 사는 것이 계단 오르기와 같았다. 계단을 오를 때 한 발을 올려놓으면 다른 한 발은 자동적으로 바로 위 계단을 향한 허공에 떠 있기 마련이고 그 허공에서 잠시 한눈을 팔거나 보폭이 불안하면 영락없이 헛디딤, 추락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15평에서 20평으로, 30평으로……. (「떠 있는 방」에서)

“세월이 너무 빨라요. 언니네는 내달이 은혼식이랍디다. 그래서 다이아 일 캐럿짜리하고 모피코트를 해달라고 형부한테 그랬대요.”
“당신 언니는 그 허영심이 문제야. 다들 정신이 썩었다구. […]”
무심히 내뱉은 말에 남편이 낯색을 달리하며 언성을 높인 것은 뜻밖이었다. 웃던 낯에 침 받은 꼴이 된 나는 무안함을 가리노라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조로 얼버무렸다.
“남의 부부 일에 당신이 왜 흥분을 하우? 내가 해달라면 불벼락을 맞겠네.”
“난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몰라. 내 사전에 그런 건 없다구.”
“다이아를 본 적도 없다니 그런 새빨간 거짓말 말아요. 당신 큰형수, 작은형수, 막내 제수, 조카며느리들까지 다 꼈습디다. […]”
말이 말을 낳는다던가. 그럴 작정이 아니었는데 녹음기 틀듯 생각지도 않던 말들이 줄줄 나오고 서러움으로 격양된 감정에 눈물이 쏟아졌다. (「결혼반지」에서)

은자는 가슴에 미미한 둔통을 느끼며 오래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날도 있었구나. 자신의 미래를 누군들 알 수 있을까. 사진에 찍힌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의 앞날을 알지 못하던 때였다. […] 시모의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망부의 추억. 그리고 몇 장의 사진 속에 존재하는 은자 부부와 그 아이들의 의미. 시모로서는 그것이 현세에서 그녀의 정들임, 관계의 모든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오늘’은 언제나 과거가 되고 추억이 되고 우리는 모두 조그만 흔적들 빛바랜 몇 장의 사진으로, 인연 맺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뿐인 것이다. (「긴 오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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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인가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것이 이러한 생이었던가

책 제목인 ‘활란’은 수록작 「사십 세」의 주인공 이름이다. 지난 세대에게 ‘당당한 선각자의 표상’이었던 ‘김활란 박사(1899~1970)’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주인공의 부모가 지었다는 그 이름은 이 책의 타이틀인 동시에, 이 짧은소설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인공들의 내면을 관통하는 이름이다. “먼 세월 저쪽 푸르렀던 날들,”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되겠다는 꿈이 있던 사람들, “모든 것이 가능성 그 자체로 남아 있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평범하면서도 삐걱대는 ‘현재의 이야기들’이 『활란』을 이룬다. 지난 과거의 꿈은 “가파르게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흐르는 물살에 돌이 닳아지듯 삭아들”고 이제 세상에 적응해가는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성적지수에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여성(「아내의 가을」), 아이들이 공부한다고 제 방들로 들어가 버리는 것에 불만인 남편(「요즘 아이들」), 며느리의 규모 없고 헤픈 살림을 나무라는 시어머니(「나는 누구일까」), 십 대 시절의 한 소녀에 대한 환상을 여전히 간직한 중년 남성(「정애」), 곗돈 타고 집 안에서 당당한 주부(「건망증」), 아이들을 집에 둔 채 자원봉사에 헌신하는 여성(「어떤 자원봉사」), 아이들과 놀아주는 젊은 청년에 괜스레 가슴 설레는 여성(「그 가을의 사랑」), 아내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새 계획을 모색할까 좌불안석인 남편(「아내의 외출」), 꽃망울 터지는 것 바라보다 가족들 아침밥을 태운 주부(「꽃핀 날」), 친구의 독립선언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운 동창들(「독립선언」), 골동품을 가보로 두기보다 박물관에 기증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소년 같은 얼굴의 남편(「골동품」), 어머니에게서 받은 보약을 자기는 안 먹고 남편에게 달여주는 딸(「보약」)……. 이들은 『활란』의 짧은소설들 안에서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삶의 표면을 보여주고 또 이면을 들춰준다.

한국 여성들은 물론 성별과 세대별을 초월,
큰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우리의 이야기, 혹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

이 책의 이야기들은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사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인 한편으로, 현재의 독자들에게 이미 지나간 이삼십 년 전의 이야기이다. 이 시절에 중년을 통과한 『활란』의 여성 인물들은, ‘활란’이란 이름이 표상하는 당당함과 새로움과 도전성을 꿈꾸면서도 오래된 기존의 규율과 가치관이 내면화된 세대에 속한다. 한때 다른 것을 꿈꾸기도 했으나 지금 안정적으로 편입된 그들의 땅은 이후 세대들에게 안전한 삶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삼십 년 전 인물들의 흔들리는 마음들이 『활란』의 곳곳에 그려져 있다. “설명하기 힘든 굴욕감”이나 “권태와 무의미와 우울”로 드러나기도 하는 이것에 대해, 장정일은 미국의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의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그 병은 “결혼 전에 진취적이고 독립적이었던 여성일수록 더욱 가혹하게” 덮쳐왔다고. 40대 전후 여성의 삶을 그린 오정희의 공감 소설 『활란』은, 시대와 성별을 초월한 우리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시대성을 그대로 드러낸 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는 다층적인 텍스트이다. 한국 문학의 큰나무와도 같은 작가 오정희의 삶과 사유의 족적이 기록된 짧은소설집 『활란』은 어쩌면 서로 다른 세대, 성별, 계층의 마음들을 가만 헤아려볼 실마리를 건네 줄 것이다.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를 몇 번이고 불러 세워 손수건, 신발주머니, 도시락 가방을 건네주며 나무랐다.
“이렇게 칠칠맞고 정신이 없어 시집가서 살림하고 살겠니?”
“전 시집 안 가요. 누구 고생시키려고?”
무쪽 자르듯 분명하고 당당한 대답에 나는 괜히 통쾌해졌다. 좀 전 당당히 물을 요구하던 아들에게서 느꼈던 굴욕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종종 어미를 종처럼 부리려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커다랗고 뻣뻣한 운동화 짝을 한없이 문지르며 빨 때, 방마다 널린 이부자리를 갤 때, 특히나 텔레비전을 보며 희희낙락하는 가족들 앞에서 엉덩이와 등허리를 보이며 엎드려 걸레질을 할 때면 설명하기 힘든 굴욕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누구일까」에서)

“‘짧은 소설집’이라 이름 붙인 이 책에는 낮은 담장 안쪽,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린 소소하고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무심결에 눈에 들어온 정경이나 당연하고 친숙한 나날 중의 어느 순간 느닷없이 맞닥뜨린 생의 낯선 얼굴, 감히 심연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세상과 삶의 미세한 균열들이 이러한 글들을 짓게 한 빌미가 되었다. […]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이나 적막감, 외로움이 또한 힘이 되지 않았던가.”_「작가의 말」에서

현모양처로 아이들을 탈 없이 키우고, 남편을 도와 자기 집과 자가용까지 마련했으니 행복해야 할 텐데, 『활란』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다. […] 집과 남편과 아이에게서 여성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나쁜 여자가 아닌가? […] 오정희가 개척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에 걸린 여성들에 대한 탐구는 이후로 젊은 여성 작가들에게 깊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 이르러 대중적인 폭발을 일으켰다._장정일, 「작품 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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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1947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오정희의 기담』, 장편소설 『새』, 동화집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 등을 펴냈고, 다수의 작품들이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어 일찍이 한국 문학의 대표작들로 해외에 소개되었다. 한국 문학에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드물던 시절부터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탄탄한 입지를 다져 이후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정희 깊이 읽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논문과 평론들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주목되어왔다. 만해대상 문예대상(2021),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12), 독일 리베라투르상(2003), 동서문학상(1996), 오영수문학상(1996), 동인문학상(1982), 이상문학상(1979)을 수상했다. 현재 강원도 춘천에 살고 있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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